한국교회의 우경화
교회가 정치의 발목을 잡는 이유
한국의 교회가 정치의 발목을 잡게 된 것은 '한국을 기독교국가를 만들어 소련에 맞서게 한다'는 미군정 정책이 성공한 까닭이다. ‘건국은 그리스도정신을 기초해야한다’고 천명한 미군정은 해방직후 불교의 한종파인 천리교 적산의 대부분을, 불교가 아니라, 기독교에게 넘겨 주었다.
많은 신도를 가진 불교, 천도교, 대종교등을 공식 종교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일제시대 일본불교가 전담했던 형무소 교화사업도 교회가 독점했다. 미군정 당시 400명 가까운 영어 통역관은 대개 친일 지주의 자녀로 유학을 다녀오거나,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유학을 한 사람들이었다.
영어가 권력이 된 것이다.
1946년 미군정의 고위직에 임명된 한국인 50명 가운데 35명이 기독교 신자였다. 당시 남한 2천만의 2,3% 지나지 않은 개신교와 가톨릭교도들이 70%로 과다대표되었다. 해방후 서울에는 30개정도 교회와 남한에는 10만명정도의 기독교인이 있었는데, 10년이 지난 후 전국 2000여개의 교회가 생겼고 그 90% 이상이 월남한 교인들이 세운 것이었다.
미군정의 도움을 받은 한경직 목사가 영락교회를 창립했을 때, 신도수가 27명이었는데, 이듬해 말에 1500명에 육박했고, 1949년에는 신도 6000명의 대형교회가 되었다. 갈 데 없는 피난민들에게 한목사의 강고한 반공주의는 안식처를 제공하여 사람들이 몰렸고, 한국전쟁 후 영락교회는 신도들에게 원조물자를 나눠주고 경찰 등 일자리를 알선했다.
조직력과 동원력을 갖춘 교회를 이끄는 한경직은 역대 정부의 애정을 받았다. 박정희가 쿠테타를 일으켰을 때, 미국은 그의 남로당 전력 때문에 지지해주기를 망설이자, 김활란 등을 대동한 한경직은 미국을 방문하여 워싱턴을 설득했고, 자유총연맹을 측면지원하며 군사정권을 비호하였다. 기독교는 반공의 보루였고 박정희는 그 보루의 세속적 사령관이라고 합리화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피난민을 포함한 구호대상자가 1000만에 이르자 정부나 민간단체는 재정이나 조직 면에서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직과 인력을 갖춘 기독교가 원조물자의 배분하는 특권을 받았다. 은혜받은 교회는 반공주의 선봉에 섰다. 은혜를 갚으려는 것 뿐 아니라, 그 태생적인 트라우마에 더 깊은 이유가 있었다.
고향에서 쫗겨온 북한사람들의 ‘원한’이 바로 극렬반공주의 촉매가 되었다. 신의주 반공 투쟁 등에 앞장섰던 그들은 반공투사를 자처하며 서북청년회를 결성하고 폭력의 선봉에 서서, 좌익테러와 제주도 4.3테러를 자행했다. 그들에겐 무서운 게 없었다.
지지기반이 미약했던 시절의 히틀러 돌격대처럼,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교회는 든든한 홍위병이었다.
제헌국회 첫회의를 ‘여러분 기도합시다’로 시작한 이승만이 당선된 뒤 전쟁이 나자, 서울시민을 남겨두고 혼자 달아나 신망을 잃었다. 그러자 그는 북진통일과 반공주의로 후려치며 권력을 공고화하는데 다시 교회를 동원하였다. 그러한 이승만을 교회와 우파들은 한미방위조약의 체결을 성사시켰다는 이유로 국부로 만들자고 한다.
한국의 존립여부는 미국의 지지여하에 달려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한국전 후, 전체 구호물자의 대부분을 담당했던 미국은 한국인들에게 구원자로 그려졌다. 미국은 민족을 ‘해방’시켜 주었고, 공산 침략에서 지켜 주었고, 경제를 일으켜 준 메시아라는 인식은 한국 교회의 정체성이 되었다. 그런 젖을 먹고 자란 한국의 보수는 자유 민주 공화같은 정통보수의 덕목을 받아들일 틈도 없이, 미국 복음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성경은 無오류’라는 복음주의는 진화론도 거부한다. 시대를 역행하는 중세종교인 것이다.
1979년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정치개입을 하기위해 기독우파(christian right) 를 조직한 뒤 10년후에 한경직이 앞장서서 한기총(한국기독교 총연합회)을 창립하였다(주사파가 전향한 뉴라이트가 여기에 가세하였다).
신의 섭리를 사람이 막아서도, 막을 수도, 없다는 복음주의자들은 클린튼을 적그리스도라고 공격했지만, 불신자 트럼프와는 궁합이 맞는다. 트럼프가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것도 그 복음주의 맥락이다.(그의 생각과 그가 하는 말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반공과 반북, 친미와 한미동맹을 성경 못지 않는 가치'라고 가르친 한경직이 이승만시대의 별이었다면, 박정희 시대의 별은 조용기목사였다.
아래 첨부한 사진은 1973년 빌리 그레엄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여의도에 운집한 ’100만’ 인파이다. 단군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 이 사진의 뒷쪽에는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보인다.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조용기 목사의 성채이다.

조목사의 성공비결인 번영신학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여러분 성경말씀에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 했어요. 어떻게 하면 하늘에 재물을 쌓겠어요. 강남에 땅을 사는게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게 아닙니다. 주식을 사는 것이 하늘에 재물을 쌓은 게 아니예요. 땅값이 올랐는지, 주가가 내렸는지 신경쓰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교회에 헌금을 하세요. 하늘에 재물을 쌓으세요. 교회에 헌금을 하면 하나님이 복을 내려 줍니다.'(완전 트럼프 어법이다)
1988년 한국교회협의회(KNCC)는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발표했다. '우리는 분단 때문에 동족을 미워하고 죽이고 속였고, 그 죄악을 정치와 이념으로 정당화하는 이중의 죄를 범했다. 특히 남한의 교인들은 반공이념을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믿음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한 죄를 범하였음을 고백한다“
이 선언에 위협을 느낀 보수교회는 1989년 한기총의 등장과 함께 전세를 가다듬어 극우화의 길을 간다. 1980년대 민주화물결에 지리멸렬해지며 위기를 느끼던 보수교회는 나라가 친북좌파에게 넘어갈 위기에 빠졌다고 반격에 나선 것이다.
기독우파는 노무현 정부의 4대개혁 입법 (보수언론과 사립학교법, 개신교와 국가보안법 개정)을 좌절시키면서 권력이 주는 짜릿한 맛에 몸을 떨었다.
2015년 개신교신도는 967만명으로 20%에 육박하는 최대종교가 되었다. 교회를 말하지 않고 정치를 말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민병두 ‘한국개신교의 보수화’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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