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란 신과 인간사이의 거리감이다
(향린교회 담임목사 한문덕목사 페북글 퍼옴)
'복음'의 심리에는 그 어디에도 죄와 벌이라는 개념이 없다. 보상이란 개념도 마찬가지다. 복음에서 '죄'란 신과 인간 사이에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지만, 이러한 모든 거리가 제거되었다는 것 - 바로 그것이 '기쁜 소식'이다. 지복은 약속된 것이 아니며 어떤 조건에 매여 있지도 않다. 지복은 유일한 실재다. - 나머지는 그것에 대해 말하려는 기호들이다. .......
그러한 상태의 결과는 하나의 새로운 실천, 진정으로 복음적인 실천 속에 투영된다. 그리스도교인을 구별짓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인은 행동한다. 그는 다른 행동 방식에 의해서 구별된다. 그는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말로도 마음속에서도 저항하지 않는다. 그는 이방인도 본토인도 차별하지 않으며 유대인도 비유대인도 차별하지 않는다. ('이웃'이란 본래는 [유대교에서는] 신앙을 같이 하는 자, 즉 유대인을 말한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경멸하지 않는다. 그는 법정에 나서지도 않으며 변호를 요구하지도 않는다('서약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도, 심지어는 부인의 부정이 입증된 경우에도 부인과 갈라서지 않는다. ~~~
구세주의 삶이란 바로 이러한 실천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 그의 죽음도 역시 다른 것이 아니었다. ...... 그는 신과 교통하기 위한 어떠한 형식도, 어떠한 의식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 기도조차 필요 없었다. 그는 유대적인 회개와 속죄의 교리 전체를 청산해버렸다. 그는 사람들이 오직 삶의 실천을 통해서만 자신을 '신적이고' '복되며' '복음적이고' 언제나 '신의 자식'으로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신에게 이르는 길은 '회개'도 아니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도 아니다. 복음에 따른 실천만이 신에게 인도해주며, 실천이 바로 신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박찬국 옮김, <안티크리스트> (아카넷, 2013. 12. 30.) 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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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무신론에서부터 저항적 무신론, 유물론적 무신론, 과학적 무신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무신론적 주장들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과 삶을 성찰하는데 아주 좋은 자료가 된다.
오염된 그리스도교와 형이상학적 서구 사유 전통에 대한 가장 치열한 비판과 반성은 아마도 니체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 손발이 떨리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의 삶은 이러한 비판적 토대 위에서 다시 세워져야 한다.
'죄'란 신과 인간 사이의 거리감이며, 그것이 극복되었다는 것이 '복음'이고, 이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신과 하나된 자로서 살아가는 삶의 실천만 있을 뿐이라는 니체의 말은 적확하다.
니체는 같은 책에서 (복음에서 벗어난) 그리스도교가 "불운을 '죄'의 개념으로 더럽혔다"(63쪽)고 일갈하고 있는데,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지옥"이라는 드라마는 이 문제를 아주 잘 다루고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교보다 크시다.
그리스도교 비판(안티크리스트)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깝게 가는 길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을 자기 안에 가두거나, 교회 안에 가두는 일들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 향린 목회 9일차